[6월 6일] 성령을 따라 행하라(요 14:16-18, 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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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신학적인 내용과 그에 대한 적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회는 복음 위에 세워졌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세워졌습니다. 사도행전의 여러 개의 주옥같은 설교 중에 ‘복음 설교’ 라는 것이 몇 개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인지의 핵심 세 가지는 하나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둘 사흘 만에 부활하셨으며, 셋,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을 말합니다. 바울의 선교여행을 통하여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졌으며, 이에 따라 충돌이 반복이 되었습니다. 이는 율법과 복음의 충돌입니다. 바리새파 유대주의 기독교인들은 복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완성이 된다는 주장을 하였으며. 그들은 바울의 사도권까지 흔들며 바울의 복음을 폄하(미혹)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갈라디아서, 로마서 등을 써서 믿음의 식구들을 계도(변증)합니다. 믿음은 율법에 우선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여호와께서 그의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 15:6) 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났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행위의 공로 없이 구원을 받는다면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거야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이는 복음을 오해해서 생긴 것 아니라 율법을 오해해서 생긴 것으로, 율법 즉 613개의 계명은 10계명의 카테고리 안에 모두 속해 있습니다. 종교 개혁가 존 칼빈이 율법의 기능을 설명하는데, 하나, 율법은 두려움을 주어 죄를 억제하게 합니다. 둘, 율법은 우리를 (죄인 됨을) 고소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갑니다. 셋, 율법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있어 율법에 순종하게 합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율법을 묵상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이 풍성한 율례의 찬송이 우리의 예배의 모범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운 마음으로 죄를 정죄하여 초등교사의 역할을 담당하고 우리 믿는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하지만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지는 못합니다. 율법은 구원받는 자의 조건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마땅한 삶을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 순서를 잘 기억하십시요. 율법이 믿음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이 율법에 선행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모세의 율법보다 약 430년을 우선합니다.

율법이 가장 잘 부각되는 사건이 출애굽사건이며, 시내산 율법(10계명) 안에서 이렇게 살아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개혁주의 신학은 율법 안에 복음이 없다는 말에 반대합니다. 행 2:29-31은 다윗이 미리 본봐, 구약시대에 예수님을 미리보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며 영광가운데 율례를 기록하고 그리스도를 찬송하고 선포하는 것(복음)입니다. 이것은 신비입니다. 신비가 없으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폐한다는 것에 반대하며, 완전하게 하려함이라는(마 5:17-19) 말씀에 동의합니다. 율법주의와 기복주의를 반대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 아래에서 믿음의 눈으로 영광을 바라보며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케 되어 말씀을 행하고 순종하여 율법을 지키면 위로가 있습니다. 우리는 정직해야 합니다. 정직한 자.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 온전한 사랑을 드리고 복음을 부르심에 마땅한 자로 그리스도를 높이고 살아가야 합니다. 무엇이 그를 낙망케하며 넘어지게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복음의 합당한 살을 살아갈 수 있을까, 구원을 받았음을 확신하지만 우리의 육체 안에 죄성(육체적, 존재적 곤고함, 육체의 강한 소욕)이 있어 그것을 끊어 내고,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적 부르심이 있는가, 나의 삶의 실제로 복음의 합당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입니다. 우리는 은혜의 언약 아래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합당한 삶을 살아라’가 전부가 아니며‘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입니다.

이 대답에 대한 성경의 내적 증거로 베드로와 예수님의 마지막 사건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열정에 대하여 예수님은 베드로의 부인을 말씀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칼을 꺼내 들었었지만 곧 이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저주하였습니다. 모든 제자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상황 속에서 그리고 그의 절망감과 실패함 속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음에도 베드로는 어부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모든 삶은 무너지고 예수님을 버린 자책감, 죄책감으로 배신의 자책과 존재적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낙망한 모습의 베드로를 찾아오신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위치(경지)에 미달한 우리를 다시 일으키시기 위하여 갈보리 언덕에 십자가가 있으며 부활을 부인한 제자들에게 디베랴 바닷가의 새벽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좌절에 빠져 있는 제자들을 먹이시고 위로하시고 세우신 것처럼 갈보리 언덕에 우리를 세우십니다.

그리고는 한마디 질문을 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 안에 회복과 치유가 있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고 현재형으로 물으시는 것은 내 안에 마음은 있지만 예수님을 따르지도 못하는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심도 아십니다. 우리는 양심에 의존하지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우리를 위하여 보내 주실 것이니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에 의지하고 성령의 담대함에 의지하므로 성령으로 충만하여 끝까지 감당하는 삶이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진리의 영으로 충만하게 오십니다(요 14:16-18). 성령은 감정, 경험, 이성이나 전통에 매이지 않습니다. 초월적인 성령은 자유롭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테두리가 되어 우리를 그 안에 머무르게 하십니다.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그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 열매에 반대되는 육체의 소욕(갈 5:19-21, 15가지,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주술,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짓는 것,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지만, 성령의 열매(갈 5:22, 9가지 그리스도의 성품,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와 양선, 충성, 온유, 절제)는 금할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의 합당한 삶을 위하여 골고다의 언덕과 디베랴 바닷가의 새벽이 있습니다. 기도할 때 성령의 충만함(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 복음의 길을 걸어 평안과 안식 가운데(요 14:27) 성령의 충만하심으로 앞서 가신 그리스도의 삶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설교요약: 이학진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