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사사기강해(2) 여호와, 우리의 사사(2: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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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말씀드린 말씀의 배경은 이스라엘의 여러 지파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고 나약함 안주함과 두려움으로 가나안 백성을 남겨 두는 것이었습니다. 사사기에는 5가지의 사이클이 있습니다. (1) 이스라엘의 반역이며, (2)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이며, (3) 슬피 부르짖으므로, (4) 여호와의 뜻을 돌이키셔서, (5) 사사를 보내주셔서 그들을 구원해 내셨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과정은 이스라엘의 반역입니다. 그 기준은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11절). 여호와의 눈과 나의 생각을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사람의 생각대로 하는 것을 죄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잣대(키)를 가지고 성경을 읽으면 말씀대로 행하는 것과 사람의 생각대로 행하는 것의 차이(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람의 눈높이대로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 것을 보고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을 때 유업의 손실과 삶의 실패를 가져옵니다. 나아만은 그의 생각대로 높은 사람들을 순서대로 찾아갔으며, 그의 생각대로 엘리사가 말씀한 요단강보다 자신의 나라의 강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주저하고 분노합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에 반대되는 것은 자기 생각을 따르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좇았지만 때때로 그들의 생각대로 행하였습니다. 신앙이 깊어짐이란 내 생각과 내 완고함을 버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고난에 처한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길을 내실 것인가’에 그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교회적으로나 우리의 삶으로나 고난에 처해 있다면 말씀의 자리, 생명의 말씀의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반복적으로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을 섬겼습니다(13절).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그 시대의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긴다는 것은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농경사회에 들어갔다는 것은 그들의 생존을 폭풍의 신(풍요의 신), 바알에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풍요를 추구하는 마음의 속삼임과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제일 큰 장애는 ‘내 생각’이며 둘째는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큰 문제는 언약 백성들이 광야에서처럼 40년간 만나를 주신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기도는 마지막으로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입니다. 우리에게 풍요를 약속한다는 바알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밥그릇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라는 어떤 목사님의 말씀은 바알 신앙과 분리되어야 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 아버지께서 얼마나 나의 실제가 되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내일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내일도 우리를 먹이실 것입니다. 그 삶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며 가나안 백성을 닮아 갔습니다. 그 결과 아도니 베섹과의 전쟁에서 가나안 백성을 닮아간 것을 보여 줍니다(삿 1:4-7). 삶의 성취와 성공이 모두 하나님께 달려 있는데 이를 부인하고 자신의 소견대로 살아감으로 실패하는 것입니다. 사사기는 진지하게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져 줍니다.

두 번째 과정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입니다(14-15절).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공의의 기준으로 심한 고통(심판)을 당합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은 축복과 저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가나안의 죄악을 보시고 가나안의 멸망을 말씀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의 그 소신대로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다니엘서의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단 5:25)은 너의 날을 하루하루를 계수하신다는 말씀으로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운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아는 것과 같은 무게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하나님만 두려워하는 것은 세상과 담대하게 맞서는 것입니다. 이 시대 신앙의 문제점은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의 부제입니다. 이 펜데믹의 시대를 지나는 우리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과정은, 남겨진 가나안 백성들은 옆구리의 가시와 올무가 되어 백성들은 압박과 괴로움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18절,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의 뜻을 돌이키셔서 사사를 보내주셔서 그들을 구원해 내셨다) 여기에 있는 ‘나아카’(성경전체에서 4번)로 회개나 기도라기보다는 고통소리, 신음소리를 듣고, 상한 자의 고통, 슬피 부르짖음입니다. 이렇게 두려움에 둘려 쌓여있으며 살아가는 삶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기도하라, 인내하라, 주께 맡기라, 믿으라, 찬양하라 기뻐하라는 은혜는 무엇인가, 이게 정말 가능한 것입니까, 복음이 정말 무엇입니까. 삶의 무게로 무너진 삶에 흐느끼는 신음소리를 하나님께서는 들으십니다. 이 본문에서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뜻을 돌이키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언약적 관계에 있는 우리를 인격적 관계로 긍휼이 여기신다(호 11:1-3, 8)는 것입니다. 이에 소망이 있습니다(참고, 사 49:15,‘잊지 아니할 것이라’), 창세전부터 우리에게 주신 긍휼과 소망은 (실패하는) 우리를 잘 아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모든 짐을 다 내려놓을 때 은혜와 긍휼가운데 새 삶이 이루어지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가 행하여지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우리의 진정하신 사사이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인격적 관계의 은혜의 긍휼이 언약적 관계의 심판의 십자가에서 만날 때 우리는 회개를 하게 되며 그 회개는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 앞에 다가감으로 은혜로 우리를 압도하여 회개와 참된 순종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높임과 경배와 찬양의 대상이 되시며 우리가 참된 변화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은혜에 무감각하여 십자가를 바라보아도 떨림이 없고 감사, 회복, 그리고 경배함이 없다면 다윗의 기도(‘내가 무엇이관데’)는 드려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어진 상황에 흔들리지(일희일비하지) 말고 십자가 앞에서 경배와 예배로 찬송 드리며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라는 고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설교요약: 이학진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