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9일] 마지막을 위한 준비 (마 24: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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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주간의 세간의 관심은, 미국이 포기하고 철수함으로 아프가니스탄은 탈레반(극우 무장세력)에 단 두 달 만에 점령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목회자요 신학자로서, 지난 2년간 세상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답변으로 우리가 깨어 있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은 지난 1년여 동안 코로나 사태, 인종 갈등, 시위 폭력, 가뭄과 기근, 전쟁과 테러, 난리와 난리의 소식으로 인하여 난민 300만 명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숫자와 같은 것입니다. 중국의 선교사의 핍박과 교회에 대한 압제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근래의 한국교회에 대한비호감은 점점 커갑니다. 한국의 대학생 복음화율 3%, 국민의 76%가 개신교 교회에 대한 부정적 비호감, 세대가 젊어감에 따라 그 비호감은 점점 커져가고 있습니다. 70%의 교회에 주일학교가 없으며, 서울의 5000명 출석 교회에 고등부 학생 40명, 새로운 신도가 부족한 교회, 청년과 지식층이 부족한 교회가 현실입니다. 그리고 2019년 통계에 의하면 현실은 이슬람 신도 30만 명, 150개 이상의 이슬람 사원이 있는 시대입니다. 현실을 조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24-25장에 종말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을 사역의 마지막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종말은 두 가지인데 개인적 종말과 우주적 종말이 있습니다. 개인의 종말은 그 징조가 확실합니다. 개인의 마지막을 누가 알겠습니까 만은 몸이 쇠락해가는 것이 징조입니다. 창세기의 시작은 요한계시록의 종말로 끝이 납니다. 날과 시는 알 수 없지만 끝이 있다는 징조는 많이 있습니다.

첫 번째 징조는, 제자들이 묻습니다. 종말의 징조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거짓 구원자(선지자)들에 의하여 사람들이 영적 곤란 가운데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재난의 징조, 참고, 눅 21:5-19, 막 13:3-13). 거짓 선지자들은 문화적 평등이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을 미혹합니다. 혼란한 가정사를 통하여 선과 악의 혼란을 봅니다. 죄와 잘못의 혼돈 속에서 어떻게 아이들을 인도할 수 있는가? 과학이 하나님을 우선하는 지식이라는 것은 거짓된 것입니다.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신앙, 즉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이에 대한 대답은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로 대신하는 것입니다.

견고한 반석 위에 신앙이 서기 위해서는 4가지가 정립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성경론(성경이 무엇인가), 기독론(예수님이 누구신가), 구원론(구원의 주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께의 순종에 있다) 그리고 종말론(마지막 때에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 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때의 신앙은 감성적으로 은혜로 채워가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교리를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환난과 고난 속에 홀로 떨어져 있더라도 깨어 있어 신앙적으로 정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 징조는 난리와 난리의 소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통계상으로 아프가니탄의 전쟁은 약 17만 명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며칠 동안 목숨 건 탈출을 영상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전쟁과 난리의 내부적인 모습은 인종적 살인 사건과 관계적인 미움입니다.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마 24:9) 이제는 한국에서 청년들이 나는 크리스천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어려워졌습니다. 용기가 필요합니다. 환란과 핍박의 자리가 아니고는 설 자리가 없어져 갑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이 믿음을 굳건히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2), 이를 잠언서(12:18)에는 ‘칼로 찌른 것처럼 뼈아픈 말을 함부로 지껄여대는 사람도 있으나”라고 말씀합니다. 교회에 무례한 말들이 성행하여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므로 충만한 기쁨이 없어지고 풍성한 사랑의 생명력이 식어갑니다. 우리는 힘써 교회를 세워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정, 교회, 사회의 마지막 때에 나타나는 징조 가운데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는 마 24:13, ‘끝까지 견뎌라’입니다. 성도는 진리 안에서 흔들리지 말고 말씀을 끝까지 붙잡고 굳건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서야 합니다. 네 믿음을 지키라. 그리스도의 군사와 같이 훈련과 말씀에 붙잡혀야 합니다, 영적 설교 때문에 오히려 말씀을 전하는 자의 영혼이 살아납니다. 말씀이 영혼을 붙들어 주는 통로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짐을 함께 져야 합니다. 성도의 삶은 말씀을 배우든지 말씀을 가르치든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말씀 위에 굳건히 서야 합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믿음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영혼에 생명력이 있도록 인생의 마지막 호흡 때까지 믿음을 지켰으므로 의의 면류관을 바라볼 수 있는 확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종말에 대한 결론으로 24:14, ‘그제야 끝이 오리라’이 세상은 전쟁과 혼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국 복음이 땅 끝에 전해질 때에 세상이 끝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복음이 전해지도록 교회에 맡기셨습니다. 1999년에 파키스탄의 북쪽에 있는 아프가니스탄과의 경계인 페사와르 지방을 방문했는데 그 지역은 극우 무슬림 지역이었으며, 아프가니스탄의 선교사들이 잠시 안식차 내려오는 지방이라는 아이러니가 있었습니다. 99년 절대 열리지 않을 나라였던 아프가니스탄이 9-11사건 이후 그 나라가 열리고 전 세계의 선교사들이 들어가기 시작하였으며, 그 때 시작된 한류가 그들에게 퍼지고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은밀하게 복음을 전하여 일 년에 2-3명의 진실된 회심자가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문제는 그들이 고향에 돌아가면 믿는 자들은 그들 자신 밖에 없으므로, 오직 그 한사람을 지키기 위하여 뜨거운 성령의 역사하심이 함께(체험)하도록 밤새 기도하며 그들을 보냈습니다.

지난 뉴스에 느낀 것은, 아프가니스탄의 피를 부르는 악한 반복(사사기의 역사)의 고리를 누가 끊을 수 있는가 입니다. 이는 진정한 사사로 오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용서의 복음, 섬김의 복음, 낮아짐의 복음, 순교의 복음으로 심겨진 씨앗들로 인하여 누룩과 같이 퍼져나가 복음이 세워지게 될 것을 믿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프가니스탄에 은혜가 계속되지 않을 것을 압니다. 심판이 휘슬을 불면 경기는 끝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여섯 번째 나팔의 재앙 때에 두 증인이 말씀을 선포하며 일곱째 재앙을 기다리는 때에 서 있습니다(계 11:3 이하). 힘을 다하여 마지막 때에는 선한 싸움을 싸우는 때 입니다. 마지막 휘슬이 불 때까지 힘을 다하여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영적 생활의 가장 큰 위기는 무감각해지는 것입니다. 눅 17:27-30은 노아와 롯의 예를 통해, 일상 속에 종말의 재앙이 있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목적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것은 살아가야할 삶의 목적, 이유, 비전, 목적과 사명을 버린 것입니다. 그 이유로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주신 ‘세례’를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맡겨주신 말씀을 땅 끝까지 전하는 사역자요 동역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현지 선교사님에게 받은 현지인의 편지는 참되신 신이신 예수님이 응답하시도록, 우리 가정이 승리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꿈과 환상으로 그들의 믿음을 보존하시고 복음에 감동되어 하나님의 오른팔에 모두 붙들림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능력은 예수님께 있으며 마지막 때 일수록 굳건하게 서서 주의 길을 예비하고 기도하고 동역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설교요약: 이학진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