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오래 전의 일입니다. 이십대의 청년 시기에, 교회 학교 교사로 섬길 때였습니다. 해 마다 어떤 청소년 친구들을 만날까 기대감을 가지고 새로운 해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 해에는 새롭게 맡은 반의 아이들 중에 발달 장애를 가진 아이가 한 명 들어왔습니다. 명길(가명)이란 아이는 소위 말하는 자폐아였습니다.  명길이는 장애 정도가 심각해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의사소통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친구였습니다. 간혹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때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 같은 소리를 내곤 했습니다. 아이를 예배 시간에 차분하게 앉아 예배를 드리게 하려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도화지를 갖다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잠시 조용히 집중하는 듯이 보이다 가도 갑자기 흥분하면 심할 정도로 옆 사람을 때리기 시작합니다.  좀처럼 진정하지 못합니다.  한 해 동안 아이의 부모님과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특별한 믿음을 가진 신실한 가족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분들의 신앙이 처음부터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안정적인 직장에 남부러울 것 없는 행복한 가정을 꾸렸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이인 명길이를 낳고 나서부터 이 가정에 고통이 시작됐습니다. 장애아를 키우는 것도 참 고통스러운 일인데, 아이의 부모님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편견에 사로잡힌 어그러진 시선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어머니는 자폐아를 낳았다는 죄책감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나 때문에, 내 죄 때문에 이 아이가 이렇게 장애를 입고 태어나게 된 것은 아닐까?’ 가족 모두가 고통스럽고 힘겨운 시간들을 지나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가족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만지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아버지도, 아이의 형도, 그리고 어머니도… 특별히 명길이의 어머니는 장애아를 낳았다는 죄책감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신앙에 대한 깊은 질문을 이어가다가 나중에는 신학공부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더욱 깊이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의 오래 전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고통의 시간을 지나야만 했던 한 가정의 이야기는 지금도 목회 현장에서 거듭 마주하는 우리들의 삶의 현장의 이야기입니다. 죄로 인해 깨어지고 어그러진 세상의 생각들을 그대로 되 물려 받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고통의 현실을 마주하고, 상처를 끌어안고 있는 형제와 자매를 바라보면서 여전히 자신의 편견 어린 시선과 주관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아파하는 지체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마치 예수님과 함께 걷던 길에서 마주친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한 사람’을 바라보면서 제자들이 던진 질문처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 9:2) 우리는 고통을 겪고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면서 내가 가진 기준과 편견으로 그 사람의 문제를 진단하고 재단하기에 급급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 날 때부터 맹인 된 자에게 모든 이들이 쏟아냈던 이전에 그가 듣던 저주 섞인 조롱과 정죄가 아닙니다. 맹인에게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은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이었습니다. 주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긍휼의 시선으로 영혼을 바라보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함께 부름 받은 우리 한길 공동체에 주님의 마음이 회복되기 원합니다. 정죄와 판단이 아닌, 긍휼과 사랑의 시선으로 서로의 아픔을 보듬고, 함께 울고 함께 웃을 수 있는 회복의 공동체로 빚어져 가길 기도합니다.

“주님, 회복의 공동체로 우리를 빚어 주시옵소서!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