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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7일]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단 4:3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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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서 1-4장의 주인공은 느브갓네살이고 4장의 마지막 부분, 33절부터는 그의 독백이며 4:37은 마지막 그의 마지막 찬양입니다. 1-4장 전체의 느브갓네살의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진정한 삶의 길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구절(4:37‘진실하고 의로우심으로 교만히 행하는 자를 낮추심이라’)은 그의 삶 전체를 요약하고 우리에게 진정한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바벨론 연대기에 보면 느브갓네살의 업적과 위용은 대단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그의 모든 업적은 대단했으며, 세계 7대 불가사이에 하나로 꼽히는 ‘하늘 정원’을 건축하였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심판자입니다. 그가 느부갓네살의 꿈에서 역사의 흐름을 보고 하나님 통치하심에 기대야할 것을 말하고, 느브갓네살은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은밀한 지혜’를 주신 하나님을 칭송하고 감격하고 고백하지만(2:47) 진실로 회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3장에서 그는 그의 교만으로 돌아가 그의 금상을 세우고 다니엘의 세 친구를 풀무불에 넣고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고 하나님을 다시 찬양합니다(4:2-3) 그리고 4장에서 그가 또 꿈으로 번뇌하며 여러 신에게 매달려 보다가 마지막으로 다니엘을 ‘박수장 벨드사살’이라 칭하며 다니엘에게 꿈 풀이를 부탁합니다. 이는 그가 기사와 이적을 경험하고도,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함입니다. 이적과 이사와 관계없이 자기교만(내면의 우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의 2번째 꿈은 땅의 중앙에 있는 큰 나무의 환상으로, 그 나무가 이롭고 아름다운 나무였지만, 심판을 받아 거룩한 나무나 나무의 모든 것이 없어지지만(피조물의 통치권을 거둬드리는 하나님의 심판) ‘그루터기는 남겨 두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나무 그루터기는 철과 놋줄로 결박을 당하고 짐승의 서식처가 되고 맙니다. 이 나무는 느브갓네살 왕을 상징합니다. 그는 짐승의 마음이 되어 정신 나간 자처럼 일곱 때를 헤맬 것입니다. 성경은 운명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섭리를 말합니다. 섭리는 모든 행하시는 일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운명론자처럼 점쟁이를 찾는 것이 아니라(고난 안에서 미래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야(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경고(4:25-26절)는 왕이 고난을 당할 것이나 끝이 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 하나님의 통치를 깨달을 때에야 끝이 있다(하나님의 나라가 견고해 질 것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야 하는데, 다니엘은 그 심정을 가지고 목회적 권고(4:17)를 하고 있습니다.

느브갓네살은 그 경고를 받은 지 일 년이 되어(변화됨이 없이) 바벨론 궁 지붕에서 거닐 때, 자신의 영광과 위엄을 말하고 자기도취에 빠져 있는 그의 말(4:31-32)이 끝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져 그는 7년 동안 짐승의 삶을 살게 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삼하 11장) 그가 교만의 도취에 빠져 왕궁 지붕을 거닐다가 밧세바가 목욕하는 보습을 보고 음란의 죄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죽게 하는 살인죄까지 저지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심중에 있는 생각이 교만한 자를 낮추십니다, 광인이 되어 들판을 헤매는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져 7년을 보낸 느브갓네살은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뜻(역사의 주관자)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하나님의 경홀히 여기지 말라) 부패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끊임없이 선지자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아니하고 그여코는 이방의 포로가 되어 이방인의 나라에서 70년의 세월을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보낸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지 않는 분이 아니라 오래 참으시는 분입니다.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시며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이끌어간다 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로 돌아간다 입니다. 이의 적용으로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를 보십시오. 작은 겨자씨(좋은 말씀)가 큰 나무가 되어 울울창창하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가라지의 비유와 연결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하는 도중에 (우리에게) 생겨난 가라지, 교만, 자랑, 자기의 의로움은 느브갓네살과 다윗이 왕궁을 거닐면서 느꼈던 교만과 같은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아모스 아들 이사야 편지를 읽고 병중에서 하나님께 의지하고 십오 년의 수명을 연장 받지만(왕하 20:1-11) 그는 하나님을 떠나고 그의 교만으로 유다의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며 유다의 백성들은 수치와 고난을 당합니다. 지난 2년 반의 목회를 돌아볼 때 내 맘에 들어온 교만(가라지)이 생겨났음을 고백합니다. 유다서(1:4)는 가라지를 가만히 들어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교만은 죄의 뿌리로서 영적 나병(아파도 아프지도 모르는 병)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교만)를 회개하고 깨닫기를 원하는 십자가의 꿈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완전한. 그리고 완벽하게 계시된 말씀입니다. 우리가 도저히 변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패역한 생명의 값으로, 첫째는 죄의 결과(심판)를 받거나, 둘째로 용서받을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생명으로 값을 치르셔서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우리가 죄로부터 충만하게 회복되는 것입니다(이는 부끄러운 구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는데 어찌 우리의 교만을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회심의 의미는 내 삶(안)의 주인을 바꾸고 그리스도 앞에 머물고, 그리스도와 함께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만일 내 자신이 초라함 가운데 있다면 하나님께서 기한을 정해 놓으셨으니 그 앞에서, 그것을 거두어 주시기를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 겸손히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시 3:3, ‘그는 나의 머리를 드는 자’). 겸손은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것을 알아 철저히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나의 부끄러움이 성화되어 나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 분의 임재는 회복의 은총을 말합니다. 고난은 가지치기였다는 것을 알게 하시며, 하나님의 뜻 안에 살기를 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회복된 자를 높이십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 있게 하여 주시오며 새 창조 안에서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높이는 삶이되기를 축복합니다. (설교요약: 이학진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