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5일] 은혜를 회복하라(마 18: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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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자녀들은 가정에서 각자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하지만 부모의 마음은 그 자녀의 도리에 대해서 계산적이고 합리적이지만은 않습니다. 부모는 자녀가 모두 잘되기를 바랍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은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연약한 자녀가 할 도리를 못한다하더라도 그 자녀에 대하여 계산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지 않습니다. 부모의 마음이 가장 하나님의 마음을 잘 표현한다고 생각합니다.

합리적인 인과율의 법칙 안에서 은혜는 부담스럽고, 우리의 삶 속에 은혜가 끼일 자리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현세대는 호의를 거북하고 부담스럽게 느낍니다. 은혜는 값없이 조건 없이 베푸는 사랑(선물, 호의)인데 그 은혜가 없는 것은 삶을 황폐하게 합니다. 돈의 개념으로, 채권과 채무의 관계로 은혜를 설명하는 것이 현세대의 주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팬데믹 아래에서 정부가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갚을 수 없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 도움(선물, 은혜)을 받았습니다.

인생에서 복음의 선물만큼 큰 은혜는 없습니다. 복음은 행위 없이 이루어지는 구원을 말합니다. 구원은 계산적으로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은혜는 기독교의 모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C S 루이스) 성육신 사건, 부활 사건, 인과응보적인 신명기의 모든 교리보다 은혜는 우선합니다. 용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잃어버린 세대에게 인과율의 법칙으로는 도저히 탕감 받을 수 없는 죄를 탕감하여 주는 것이 은혜이며, 그 은혜를 회복하며 그 은혜를 나누므로 죄를 모두 탕감 받은 복된 성도, 복된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용서(은혜)에 대해 묻습니다(21절) 예수님 당시의 관용의 자세로 랍비들은 3번 용서하라고 말씀했지만 베드로는 7(히브리의 완전수)을 이용하여 용서뿐만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이 (철저히)잊어짐을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일곱 번을 칠십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답하십니다(22절). 하지만 이런 무제한의 용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용서가 아닙니다. 행위적으로 율법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 용서를 받았으므로 우리의 동료를 용서하라는 비유입니다.

이는 천국의 특성(교회의 특성)을 말하는 것으로, 천국은 용서함을 받은 공동체가 긍휼로 은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정부에서 실업수당을 받은 것은 (정말 살아갈 수 없는 상태에서) 갚지 못할 빚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비유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임금(주인)은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에게 그 빚을 갚으라고 종용합니다. 일만 달란트는 한 사람의 20만년치의 급여입니다. 하루 동안 6천만 명이 일한 품삯입니다. 은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이며(금은 은의 가치에 6배에 해당합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이는 사람이 일해서 갚을 수 있는 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소유를 모두 팔아서 갚고 그 자신의 몸과 처자까지도 모두 팔아서 갚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노예 한 명의 몸값이 500-2000 데나리온 이었습니다. 그 가족을 모두 팔아야 6천 데나리온입니다. 그러므로 그 빚은 도저히 값을 수 있는 빚이 아닙니다. 그 종은 주인에게 자비를 구하고 용서를 구하며 그 빚을 갚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그가 자신의 빚(죄)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대신 자신의 의를 더하여 자신의 죄(빚)를 자신이 해결하겠다는 것입니다. 무능하고 연약한 종이지만 주인은 그의 말을 듣고 탕감해 줍니다(27절). ‘불쌍히 여기다’(내장까지 움직일 수 있는 측은히 여기는 결렬한 감정)는 긍휼함을 말합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실현 불가능한 율법적인 의로움에 대해서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복음서 곳곳에서, 주님께서는 죄와 사망에 고통 받는 것을 보시고 애통해하시는 것이 여러 곳에 나타나 있습니다. 특히 눅 19:41, ‘그 성을 보시고 우시며’ 비통한 통곡을 하십니다. 이는 인간의 죄성에 대한 애통함이며, 자기 의와 공로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이기적인 사람들을 깨우쳐 주시는 예수의 마음입니다. 이는 율법적인 용서가 아니고 복음의 이야기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이유입니다. 그 분이 이 땅에 오신 이유이며 십자가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탕감하다(용서하다)는 비유를 통해 죄사함의 은혜를 가르쳐 주십니다. 빚의 탕감은 죄의 용서입니다. 당시의 아람어로 빚(호바)은 빌린 돈 혹은 죄를 의미하며 빚의 탕감과 죄의 용서의 비유를 통해, 빚(죄)은 우리의 능력 밖에 일임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 큰 빚(죄)을 탕감 받은 그 사람은 같은 처지의 사람(1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고의적이고 이기적인 탐욕스러운 감정을 드러내고 그 사람을 감옥에 넣습니다. 이는 구약의 율법에서 금지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인간의 탐욕스러움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결산할 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임금은 ‘악한 종아 그 동료를 불쌍하게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5:7은 긍휼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합리와 상식을 따지는 우리가 거짓과 속임으로 책임을 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용서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헌신적인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이 긍휼(용서)은 교회를 통해 흘러갑니다. 율법적인 행위가 아닌 참된 은혜는 또 다른 은혜를 낳습니다. 은혜는 천국과 교회에 주신 선물로 죄를 사함은 예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은혜입니다. 은혜의 가치를 잘 아는 사람만이 은혜를 흘려갈 수 있습니다. 은혜는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며 교회는 그 은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헌신과 긍휼과 자비로 가득찬 마음과 성품으로 우리를 채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값진 희생으로 교회는 은혜와 긍휼을 베풀고 이기적이지 않은 화목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회복해야 할 것이 교회의 은혜를 회복하고 베푸는 교회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설교요약: 이학진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