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일] 사사기강해(10) 내 안의 가시나무(9: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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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의 주제는 하나님이 왕되심을 버리고 인간이 스스로 왕됨입니다. 사사기의 전체에서 가장 참담한 장인 9장은 아비멜렉이라는 자가 최초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아비멜렉은 원망스럽고 원통한 환경에서 자랐을 것입니다. 그는 이방여인 첩에게서 태어난 자입니다. 그의 이름이 ‘나의 아버지가 왕이라’는 것은 그의 자부심이라기보다는 열등감으로, 그 열등감이 교만과 만나서 지어진 이름일 것입니다.

세겜 사람들의 억눌림과 상처에 우리가 골육(아비멜렉의 정체성, 므낫세 지파와 세겜-이방사람)이라고 호소한 아비멜렉은 나를 왕으로 삼으라고 요구합니다. 세겜 사람들은 이방 신전의 돈으로 경박한 자들을 사서 아비멜렉과 오브라 성읍에 가서 기드온 아들 70명을 죽이는데(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일), 단 한사람 요담은 도망하고, 아비멜렉이 왕이 되는 날에 요담이 그리심산(심판의 산)에 가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을 저주하는 비유를 토하게 됩니다. 이는 감람나무(영화로움과 신령함 그리고 윤택하게함), 무화과나무(열매가 꿀같이 달고 싱그러움의 열매 맺음), 포도나무(포도주는 번영과 평화의 상징, 이스라엘의 나무로 상징)의 거절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는 우리에게 주시는 자리를 지키는 것이 그 자리입니다(시 16:6, 줄로 재어져 맞춘). 맞춤 양복이 딱 맞는 것처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리는 임재와 섭리로 우리를 이 자리에 세우셨고 보내셨고 지키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지키는 순종하는 자들이 받는 복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기름 부으심입니다. 이는 영적권위입니다. 참된 만족과 풍성함이 있습니다. 특별한 임재와 은총이 있는 자리입니다. 두 번째 복은 열매 맺는 복입니다.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예수님의 무화과나무의 비유). 세 번째 축복은 하나님과 성도들을 기쁘게 하는 자리입니다. 삶의 영역을 지키고 순종하며 충성하는 자로, 가장 큰 자는 가장 작은 자리에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이며 선교사로, 직분자로, 또한 가정을 지키는 자들로 헌신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네 번째 비유인 왕이 되겠다고 나선 가시나무는 내 그늘에 와서 피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아이러니입니다. 오직 불쏘시개로 쓰이는 가시나무 아래(그 안)에는 그늘(쉼)이 없습니다. 그리고 불이 나와서 파괴할 것이라고 윽박지릅니다. 가시 엉겅퀴가 열매 맺는 나무와 만나 얼크러지면 그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 대답은 20절에 있습니다. 우쭐대는 자로 인하여 서로를 불로 사를 것이라는 것입니다.

깊은 상처가 있는 아비멜렉의 열등감과 교만이 만나서 세겜에서 왕이 되는 자리에 요담은 비유로 아비멜렉을 저주하지만 아비멜렉은 승승장구하면서 요담이 외치는 하나님의 공의는 없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악인의 번성함과 형통함을 보고 요담은 힘이 빠지고 비통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자문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침묵과 같은 시간, 삼년이 지나고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시작되었을 때 그 침묵의 시간이 참회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열의 영을 보내셔서 그들이 가시 밖에 없는 아비멜렉을 배신하고 아비멜렉과 닮은 가알이 나서서 모반을 일으키는데, 아비벨렉과 똑같은 언어(나는 순전한 세겜 사람이다)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하지만 그 모반은 실패하고 세겜사람들은 그 씨를 거의 말리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본질은 우리가 행하였던 그대로 나타납니다. 아비멜렉이 군사를 일으켜서 세겜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전쟁 말미에 데베스의 한 여인이 던진 멧돌 윗짝에 맞아 죽게 되는데, 이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죽음은 대대로 전해져서 이스라엘의 역사(다윗의 때)에서 한 번 더 상기합니다(삼하 11:21하). 심판의 이유로 나타난 재앙의 모습은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그 포악한 모습이 그들에게 그대로 행하여진 것입니다(9:24). 삼년동안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신 그 기간이 회개할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하나님께서 행한 일은 요담의 저주를 그들에게 갚으신 것이었습니다(9:56-57). 하나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유효기간이 있습니다(갈 6:7) 하나님은 업신여김(만홀히 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고 그 심판이 도적같이 임하는데, 심은 대로 거두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언젠가부터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말씀이 세련되어 심판은 없어지고 사랑만이 강조되어 왔습니다. 심판 없는 복음(구원)의 가벼움은 현재 팬데믹 상황의 인플레이션과 흡사합니다. 구원이 무엇인가 제대로 생각함 없이, 구원받은 자의 책임 없이, 찍어내듯이 만들어진 구원의 대량화에 복음이 싸구려가 되어, 구원의 은혜에 만족하지 않고 감동하지 않는 이 상황에서, 북한의 기독교인들이 세례를 받을 때 묻는 마지막 질문은 ‘죽음으로 기독교인이 되겠냐’는 것으로, 그들의 구원과 우리가 누리는 구원이 질적으로 같은 가를 질문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도에서 예배 중인 교회에 불을 지르고 많은 사람이 타 죽었으며 빠져 나오는 사람들을 모두 칼로 죽인 곳에서 겨우 겨우 살아남은 14살짜리 한 여자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말(복음)은 ‘영원한 안식의 천국과 영원한 형벌의 지옥이 있다는 것이며. 심판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너의 억울함을 갚아 주실 것이므로 도적같이 하나님의 사자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기다리라’라는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살면서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가족으로부터, 권위자로부터 받은 오래된 상처가 나의 교만과 만나게 될 때에, 나의 인생은 파괴적으로 변합니다. 안으로 깊은 절망 끝에 죽음을 생각하게 하고, 밖으로는 나를 건드리는 다른 사람을 저주하고 심정적으로 죽이는 가시나무와 같은 아비멜렉과 같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황폐해진 우리를 위하여 선생이나 치료자가 아닌 구원자가 오셨습니다. 나의 죄로 인하여 죽으셨다는 것(하나님의 심판)과 율법 정신의 다른 측면은 공의로우신 복음의 완성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의 씨앗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붙드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살게 하시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내가 뿌리는 재앙이 모두 심판이 될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의 생명이 내 안에 계시니, 내가 내 자리를 지키며 유다(소망)의 사자로 오신 예수님을 뵈올 것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사사기 9장, 역사에서 가장 참담한 곳에 가장 찬란한 복음이 비추어져서 우리를 참된 구원으로 인도하실 것을 바라며 기도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설교요약: 이학진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