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0일] 할례 문제로 생긴 일들(행 1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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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임직식을 맞아 사도행전 말씀을 전합니다. 왜 교회에 문제가 많을까 자문해 봅니다. 교회는 죄인들이 모인 공동체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광된 몸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교회는 믿는 신자들의 공동체이기도 하지만 자라나는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양면성을 갖는 교회의 역사는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가 알아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교회의 역사는 사람이며 임직은 사람을 세우는 일뿐 아니라 교회를 세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할례 때문에 새긴 초대 교회의 4가지 문제점을 살펴봄으로 건강한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첫 번째 문제로서, 종교회의에 제기된 것은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져서 흥왕하여 질 때에, 유대인 신자들은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자기들의 공동체에 들어올 수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는 복음의 근간을 흔드는 것(복음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으로 오히려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 안에서는 다툼이 일어나게 되어 예루살렘 공회에서 안건으로 다루게 되었습니다. 우선 예루살렘 교회에는 유대인 신자들이 99 퍼센트 이상 되었을 것입니다. 대다수의 유대인 신자들이,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발의에, 베드로가 일어나서 발언을 시작하는데, 바울은 아마도 가슴이 철렁했을 것입니다. 이 공회 바로 전에 안디옥 사건(게바와 바울의 충돌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방인 신자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베드로가 일어난 것을 가지고 베드로를 크게 책망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우려와는 달리 베드로의 증언은 행 15:8-11에 나와 있는데, ‘하나님께서 차별하지 아니셨는데 어찌 우리가 이방인을 차별할 것이냐’라고 하는 것이며, ‘우리와 우리 조상이 메지 못한 멍에를 어찌 그들에게 강요하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요엘 선지자가 말한대로 성령이 차별 없이 부어지면 저희가 예언할 것이라는 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며, 이는 어찌 육체의 할례가 예수님의 보혈의 피에 앞서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권위에 대해 바나바와 바울이 화답하여 일어나 성령의 능력으로 그동안의 사역(이방인 중에서 행하여진 표적과 기사)이 이루어졌음을 보고합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기도의 사람이라 낙타 무릎이란 별명을 가진,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일어나서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남은 자들과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괴롭게 하지 말고(그들의 목에 멍에를 메지 말고)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말씀하는데(행 15:19-20) 이는 다만 권면 사항으로 십계명을 대표하여 말씀한 것입니다. 이는 배려입니다.

둘째는, 우리는 믿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헛되이 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사도들과 성도들이 모여 회의하고 토론하여, 주님의 복음이 변질되지 않고 전해지게 된 것으로, 이는 성령님의 인치심과 충만한 인도하심으로 된 것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말은 없지만 삼위일체 교리를 결정한 것은 주후 325년 니케아 회의이며, 397년의 카르타고 공의회에서는 성경 66권의 목록을 결정하였습니다. 한번은 성도님들께 당회를 위하여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당회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사하는 것입니다. 당회를 위한 기도는, 성령님의 뜻을 나타내고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지혜와 총명으로 세움 받은 장로들이 완고함을 멀리하게 해달라는 것이며 그리고 교회의 모든 회의에서 합의로 결론에 도달할 것을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서로 양보하는 것이 중요하기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지는 정체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1) 다윗의 왕가, (2) 약속의 땅, (3) 하나님의 성전, 그리고 (4) 할례인데, 할례를 양보한다는 것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버리는 것입니다. 각기 사람들이 마지막 자존심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받아드리는 것은 목양의 손길입니다. 할례는 목회적 규례를 목양적으로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할례를 붙잡고 사는 것이 필요하지만 새 시대의 목양의 마음이 부족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무엇을 지키고자 했던가를 직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 번째로 이 결정을 각 교회에 전해야 하는데 생각하지도 않은 일이 일어납니다. 마가를 선교여행에 데리고 가는지의 여부를 놓고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고 헤어집니다. 이 사건은 성도들 사이에 많은 질의와 논의를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사건을 덤덤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바울이 마음이 상하여 반대했다고 생각하지만 골 4:10-11에서는 할례파인 타협 없는 마가를 언급합니다. 과연 선교 여행에 마가를 데려가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명명백백하게 기록을 남겼는데, 바울의 마음을 밝히지 않은 것은 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바울을 비난하는 사람들 그리고 바나바와 마가를 비난하는 사람들로 많은 말잔치가 일어날 수 있었지만. 성경은 이 사건에 대하여 침묵합니다. 침묵에 대한 공백은 신뢰로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어 마지막 때에 심판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하지도 않는 사건(16장)이 일어나는데, 디모데의 할례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 얼마나 말이 많겠습니까만은, 바울은 율법과 할례를 모독하고 폄하한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이 구원받는 것을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질을 붙잡은 자의 여유로서 고전 9장에서 율법 아래에 있는 자와 율법을 초월한 자, 그리고 약한 자와 강한 자의 차이를 비교합니다. 본질을 붙잡은 자는 흔들리지 않는 자입니다. 비본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다툼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교리와 말씀을 통하여 본질을 굳건하게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풍성하게 세우는 것이며, 달리기 할 때에 팔을 자연스럽게 앞뒤로 흔드는 것과 같습니다. 영생을 붙들면 세상에서 포한(抱恨)이 될 수 있는 것까지도 아무렇지 않은 것이 되어 버립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그 당시에 추천서가 없는 바울은 말썽이 많은 고린도 교회에서 ‘너희가 나의 추천서’라고 당당히 말합니다. 바울은 마치 자식을 품는 아비와 같은 심정으로 교회를 세워 갑니다. 여러분들도 주님의 핏값으로 세우신 이 교회를 함께 세워 나가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설교요약: 이학진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