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7일] 사사기강해(11) 은혜로 사는 사람(10:10-16,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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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께서는 입다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설교가, 신학자들의 평가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면으로 양분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정의로 팀 켈러 목사님은, 입다는 ‘위대한 구원자의 흐릿한 그림자이다’라고 평가합니다. 사람을 평가한다면 그 마지막을 보면 알게 된다고 하는데, 입다의 마지막은 자신의 딸을 가증하고 비극적인 인신제사(번제)로 드리는 비극적인 이야기입니다. 여러 사사들의 마지막은 반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평안한 삶(샬롬)으로 끝나지만, 입다 이야기의 마지막 이야기는 요단강 서편의 에브라임 사람과 요단강 동편의 길르앗 사람들과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서 길르앗 사람들이 요단 동편에 침입한 에브라임 족속을 쳐 죽이는데, 요단 강가에서 ‘쉽볼렛’을 발음하지 못하는 에브라임 사람들을 4만 2천명이나 쳐 죽여 에브라임의 씨를 거의 말린 참혹한 결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샬롬이 없는 어지러운 환경으로 인하여 입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며, 반면에 그가 히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의 반열에 들어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입다는 기생에게서 태어난 자식으로,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평생을 주홍글씨가 새겨진 채로 역기능적인 기울어진 운동장 같은 환경에서 자라고 살아간 자입니다. 그의 유년 시절에 형제들에게 쫓겨나 본 고향에서도 살지 못하고 돕이라는 시골에서 잡류들과 살아갑니다. 혹시 우리 중에 깨진 가정에서 주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제반 환경이 어려운 가운데 주변인으로 살아오신 분들이 우리 교회 안에도 있을 줄 압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목하여 보시고 쓰시는 자는 상처나 아픔이 없이 좋은 환경에서 자란 자가 아니라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자들이며, 이러한 자들을 세우시고 채우시고 복을 주셔서, 의문이 가고 수긍이 가지 않는 인물을 높이 쓰시는 것으로,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길르앗이 암몬에 침략을 받게 된 때에 큰 용사인 입다는 자기를 버린 자들의 손에 의하여 쓰임 받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잘 나타내는 한나의 기도(삼상 2장)는 하나님의 경륜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모두 염려를 맡기는 고백을 드리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의탁하며 순전한 모양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각기 사사들은 특징(외손잡이 에훗, 종려나무 드보라, 삼백용사와 기드온)을 가지고 있었는데 입다는 황금의 입을 가진 협상가입니다. 그는 세 부류의 사람들과 협상을 합니다. 첫째는 길르앗 장로들과의 협상을 통하여 머리가 되겠다는 것입니다(11:8). 그는 협상을 통하여 군사 통제력과 확고한 정치적인 입지를 모두 가지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 협상의 대상은 암몬과의 협상인데 그 세 가지 근거는 (1) 역사적 근거(11:16-23)로 저들과 전쟁을 피하기 위했던 삼백년 전의 역사적 근거(민수기)를 정확하게 말하고 (2) 신학적 근거(11:24)로 너희 신인 그모스보다 여호와께서 더 강하므로 우리 땅이 된 것이다. (3) 관습적 근거(11:26)로 우리가 이 땅에 300년 이상을 살았는데 왜 이제 와서 달라고 하느냐 이는 침략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입다가 마지막으로 협상 대상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삼고 저지른 그의 인생의 가장 큰 과오는 하나님과의 거래(11:30-31절)입니다. 가나안 족속의 관습(인신제사)을 서원하여 그 서원 대상인 그의 무남독녀, 딸이 올무가 된 것입니다. 그는 삶의 질이 환경적인 요인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은혜로 사는 삶이라는 것을 배우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생활에 치어서 주고받는 거래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정하였다는 것이 그의 크나큰 과오였습니다. 하나님께 더 크고 좋은 것(인신제사)을 드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더 많은 복을 받는다는 그의 관계설정이 가져온 참혹한 결과입니다. 가장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가장 선하시고 좋은 것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 것입니다.

그 근거는 사사기서 10장의 내용이 그것인데, 너희 이 반복되는 배역과 패역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일곱 번이나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다시는 구원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시지만(10:6-14). 10:16에 이스라엘 백성이 또 곤고하고 힘들어 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번뇌(근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계약에서 파국에 도달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이해하고 감당하기 힘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절할 수 없는 마음은 돌아오는 탕자를 보고 달려가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을 작정하신 것이 그 근거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칼빈은 성화의 최고봉은 은혜로 살기를 배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것은 새로운 프로그램이 아니라 기독교인이 은혜로 살아가는 것을 실천하는 것으로, 이때에 세상은 교회를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무엇을 계획하고 추진할 때에 하나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인생의 계획서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추가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7번(완전수) 넘어질 때마다 하나님의 풍성하신 측량할 수 없는 은혜(엡 1:17)로 회복됩니다. 우리의 본질은 롬 3:23 에서 말하는 것처럼 과녁에서 빗나가고 기준치에 도달하지 못한 존재론적인 실패자(죄인)이지만 우리는 은혜로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자일지라도 그에게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하나님 앞에서 실패하고 좌절한다면 우리의 삶은 성공한 삶이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실패하고 좌절하지만 우리의 삶은 소망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진멸되지 아니하고 아침마다 풍성하게 부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렘 3:22-23).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은혜(엡 2:7)는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 세대의 우리에게 나타내게 하시려고 교회를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충만한 은혜의 삶이 우리에게 흐르기를 바랍니다. 내 힘과 노력으로 드리게 되는 것은 은혜의 조건이 아니고 은혜의 반응(열매)입니다. 입다의 생애의 애석한 것은 은혜를 모르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은 그 이유와 근거를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 때에도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하는데, 고난의 이유와 근거를 묻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시를 제해 달라고 세 번 달라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네게 주신 은혜가 족하다고 말씀하신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의 삶을 채우는 마음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은혜로 사는 삶을, 칼빈은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께 대답을 바라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뉴저지에서 사역할 때에 찬양교회의 허봉기 목사님의 딸이 괴한에게 습격을 당하여 이유 없이 죽음을 당하였을 때에, 허봉기 목사님이 칼럼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헤쳐 나가는 길을 알지 못하지만 피해 나가는 일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 아들을 잃으신 적이 있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유도 근거도 찾을 수 없는 고난이 나에게 일어났을 때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면서 입다의 이야기는 너무 황당하고 피하고 싶은 이야기로서 왜 하나님 나라에 이러한 황당한 사건이 일어났는가에 대하여 분노하고 황당해 하십시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는데 이방신들의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희미한 그림자인 입다와 같은 나를 위하여 찬송을 수십 번 부르며,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에 담을 때 고난의 이유를 묻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웬말인가 나를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찬송을 부르며 주님께서 주신 은혜 안에 거하고, 그 은혜가 흘러가는 삶이되기를 축원 드리며, 하나님의 은혜로 눈물과 기도로 충성하는 십자가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설교요약: 이학진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