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 예수님도 기도 시간이 필요하셨나요? 기도에 대해서는 의무감도 들지만, 의문도 듭니다. 기도한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 정말 하나님이 계신 것일까? 의지를 가지고 기도를 결단해보지만, 금세 기도는 힘을 잃고 무기력해집니다. 기도 제목들이 피부에 와 닿지도 않고 기도가 허공의 메아리처럼 느껴집니다. 누군가 병이 낫거나 문제가 해결되어도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도 듭니다. 기도는 내게 어렵습니다. 나에게 기도는 냉소와 죄책감의 단어가 되었습니다. |
예수님은 해뜨기 전에 일어나 동구 밖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침에 방해받지 않는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도가 무엇이기에, 예수님도 기도를 필요로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와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만 나왔다 하면 극히 의존적인 어린 아이처럼 되셨습니다. “아들이…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요 5:19).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 5:30)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요 8:28) 인간이 되신 예수님이야 말로 역사상 가장 하나님께 의존적인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믿으라고 할 때, 그것은 무슨 영적 에너지를 스스로 만들어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처럼 우리에게도 인생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자원이 없음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처럼 당신도 스스로는 인생을 살아갈 수 없음을 안다면, 기도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 됩니다. |
대답: 예수님의 예는 기도의 핵심이 관계임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 의무를 수행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 곁에 가까이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로지 하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을 규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하나님 밖에서 스스로 자아를 찾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관계를 막론하고 관계가 증진되기 위해서는 함께 보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시간들을 통해서 친밀함이 싹트고, 서로의 마음을 점차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친밀함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친밀함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뿐입니다. 구별되고 방해받지 않는 조용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효율성,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은 친밀함을 죽이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려고 사람과 소음을 떠나셔야 했다면, 우리도 그래야 할 것입니다. |
(1) 걸음마처럼 조금씩 시작하라.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려면 걸음마를 배우듯 조금씩 시작하십시오. 과거에 30분간 기도하며 참 좋았던 기억이 있더라도 그것을 기준으로 삼지 마시고, 천천히 시작하십시오. 걸음마처럼 처음에는 5분이라도 좋습니다. 다만, 단 5분이라도 소리 내어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십시오. 예수님도 소리 내어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대제사장 기도(요17장)의 내용을 아는 것은 예수님의 기도 소리가 제자들에게 까지 들렸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뭐라고 기도하셨는지 알게 된 것도 그분이 아버지께 마음을 쏟아 놓으시는 것을 제자들이 엿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마구잡이로 쏟아내는 중언부언도 아니지만,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는 명상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본을 따라 기도의 걸음마를 시작해봅시다. |
(2) 무력함은 기도하게 한다. . 무력함이라면 질색입니다. 누구나(저도) 그것을 싫어합니다. 무슨 수나 방도를 구하거나, 하다못해 나의 문제를 들어 줄 친구라도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무력하지 않아서 입니다. 스스로 사역을 꾸려갈 수 있고, 건강한 가정을 이룰 수 있고, 세상에서 실족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기도의 입을 닫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빈손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채 그대로 오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것을 스스로 처리한 후 정돈된 영혼을 맞이하고 싶으신 것이 아닙니다. 오 할레스비는 “기도란 당신의 무력함을 예수께 가져가는 것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복음서에서 보듯이 사람들은 무력함 때문에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이 없었고, 병자는 건강이 없었으며, 무리는 빵이 없었고, 시각장애인은 시력이 없었고, 나사로는 생명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약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했고, 약했기 때문에 그분을 따랐습니다. 우리는 무력함에 질색하지만, 그 무력함이 기도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
(2) 아이들처럼 구하라. 어린 아이들은 부모님께 아무것나 구합니다. 반복해서 구합니다. 몇 번이고 계속해서 우리를 지치게 만듭니다. 잔꾀 없이 머릿속에 있는 것을 그냥 말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과 능력을 철석같이 확신합니다. 조르면 (좋은 것은) 결국 부모가 해줄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본능적으로 신뢰합니다. 당연히 부모는 나에게 잘해줄 것이라는 전제로 시작합니다. 부모가 나를 사랑해주고 보호해 준다는 것을 알면, 나의 세계는 가능성으로 충만해집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순진함은 줄고 냉소는 늘어납니다. 기도는 어른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처럼 하는 것입니다. |
(3) 훈련보다 가난한 심령이 필요하다. 기도는 훈련하고 학습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곤란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늘 아버지께 부르짖는 것뿐이었습니다. 자주 그러다 보니, 지금은 나도 모르게 기도하고 있을 때가 많아졌습니다. 우리는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도 없을 만큼 지쳐 있을 때가 많습니다. 삶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것만 알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 아바 아버지”라고 그분을 찾고 도움을 요청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도하는 훈련이 아니라 가난한 심령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면 우리 마음속에 성령의 사역을 위한 공간이 생기고 그곳에서 새 역사가 시작됩니다. |
(4) 불안은 기도의 출발점이다. 우리는 불안과 싸우는 대신 불안을 디딤돌 삼아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할 수 있습니다. 불안을 억누르거나 관리하거나 혹은 즐거운 일로 덮으려고 하기보다 그 불안을 하나님께 가져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느새 우리는 끊임없는 기도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불안은 기도로의 초대장입니다. 자신의 삶을 통제하려던 것을 멈추고 오히려 불안과 문제를 계기 삼아 기도로 나아가면,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것을 준비하고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
(1)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정말 나는 성경의 진리를 복음으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2) 성경이 말하는 기도가 특이한 점은, 기도 자체가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기도 자체가 응답이다” 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3) 나의 불안과 무기력함과 가난한 심령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시간을 마련해봅시다. 걸음마처럼 작게 시작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생각해보고 구역원들과 나눠봅시다. |
